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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역사

이익상목사의 유물과 함께보는 성경과 역사

성경과 역사 3

메사 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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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하늘색은 ‘이스라엘’이라고 읽는 모압어이다.
  • 2녹색은 아합의 집안인 ‘오므리’라고 읽는 모압어이다.
  • 3갈색은 구약 성경에도 등장하는 지명 또는 인명들이다. 메사 석비는 주로메사가 정복한 도시들의 명단이 등장하는데, 대부분 성경에도 이 도시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 4빨간색은 하나님의 이름이다.
  • 5핑크색은 모압의 신인 ‘그모스’이다.

메사석비 번역

1행 나는 메사, 그모스의 아들이자 모압의 왕이며 디[본 사람이다.]

2행 [디]본 사람이다. 나의 아버지는 왕으로 모압을 30년간 다스렸다.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3행 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나는 케리코 Qrchh 에 그모스를 위해 이 산당을 만들었다.

4행 왜냐하면, 그가 나를 모든 왕들로부터 구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내 모든 적들을 굴복시켰기 때문이다. 오므[리는]

5행 [오므]리는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그는 오랜 날 동안 모압을 압제했다. 왜냐하면 그모스가 자기 땅에 화가 났기 때문이다.

6행 그의 아들이 그를 이었다 (그를 이어서 왕이 되었다). 그 역시“나는 모압을 압제하겠다”고 말했다. 나의 날에 그의 말대로 했다.

7행 그러나 나는 그와 그의 집을 업신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폐허가 되었다. 그렇다! 영원히 폐허가 되었다. 오므리는 [메데바의 모든] 땅을 소유했다.

8행 메데바의 [모든 땅을 소유했다.] 그리고 그의 날에 그곳에 살았고, 그의 아들은 그의 날의 반인 40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생략)

20행 나는 200명의 모압 사람들을 데리고 (부대를) 나누어 야하스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을 점령하였다.

21행 디본에 (야하스를) 복속시키기 위해서 [그곳을 점령하였다.] 나는 케리코 Qrchh를 건축하였다. 나무들로 성벽을 세우고, [성채의] 벽을 둘렀다.

22행 성채의 [벽을 둘렀다.] 문들을 만들고 망대를 세웠다.

23행 나는 왕궁을 건설하고 [도시] 안쪽에 샘의 물 저장고를 만들었다.

24행 도시 [안쪽에 샘의 물을 저장하는 시설을 만들었다.] 케리코의 성읍 안에는 물 저장고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했다. “[너희] 각 사람들은 만들어라.”

25행 “너희 [각 사람들은] 집에 물저장고를 [만들어라.]” 그리고 나는 [이스라엘의] 포로들에게 케리코의 물길을 두르게 하였다.

26행 이스라엘의 [포로들]. 나는 아로엘 Aroer 을 건축하고, 아르논 Arnon 에 군사 도로를 닦았다.

27행 나는 벳 바못 Beth Bamot 을 건축하였다. 왜냐하면 그 곳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베셀 Bezer 을 건축하였다. 왜냐하면 (그 곳이) 폐허(로 남겨졌기 때문이다.)

28행 디본 (사람들)은 잰쟁 명령을 대기하였다. 모든 디본 사람들이 내 수하에 있게 되었다. 나는 왕이다.

29행 나는 수백개의 마을을 거느리고 있는 왕이다. 나는 땅을 넓혀가고 있다. 그리고는 나는 건축하고 있다.

30행 [나는] (벳 메데)바 Beth Medeba 와 벳 디블라다임 Beth Diblaten 그리고 벳 바알 므온 Beth Baal Meon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거기에 데리고 왔다... 

31행 그 땅의 양들을 [데리고 왔다.] 그리고 그곳에는 하우란 Hauronen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32행 그모스가 내게 말하였다. “내려가라, 하우란 사람들과 싸우라.” 나는 내려갔다.

33행 그모스는 나의 날에 회복 시켰다... 그곳으로 부터...

34행 그리고 나는

고고학은 과거의 이야기를 역사로 바꾸어 놓는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이런 신비한 힘을 존중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고학자들, 그리고 성서학자들에게는 땅 속에서 나온 유물들이 가치를 매길 수 없으리 만큼 가슴벅찬 숨쉬는 생명체이며, 인류가 함께 소유해야만 하는 선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그저 경제적인 가치로만 그것을 판단할 뿐입니다. 이 좋은 예가 디본(Dibon : 사해 동쪽 요르단의 마을)에서 있었습니다.

19세기 말은 전문 고고학자, 또는 아마추어 고고학자들이 활발하게 고대 서아시아 지역의 유물을 발굴하던 시기였습니다. 특별히 아마추어 고고학자로 분류할 수 있는 개신교 선교사들이나 로마 카톨릭, 정교회 성직자들, 그리고 베두인들은 성경과 관련된 유물을 찾기에 열정적이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 지나치게 경쟁적이어서 문제가 되던 시기였습니다.

1868년 클라인(Klein) 선교사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메사의 석비 Mesha Stele’는 바니 하미다(Bani Hamida) 족이라는 베두인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 땅을 지배했던 오트만 제국은 그 석비의 소유권을 제국으로 인도하려고 했는데, 값비싸게 고고학 유물이 팔려나가던 시절, 베두인들은 정부에 대한 불만과 정부에 빼앗기기 전에 한 덩이가 아니라, 여러 조각을 내다 팔아버리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모닥불을 피워 석비를 달군 다음 차가운 물을 붓고는 단단한 돌로 내려 찍어 석비를 조각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도우셨을까요? 석비가 깨지기 전, 1869년 10월에 프랑스 동양 학자인 클레몽-개누(Charles Clemont-Ganneau)가 예루살렘에서 사람을 보내어 석비의 탁본을 떠 놓은 것입니다. 깨져버린 메사 석비가 예루살렘의 유물 시장에서 팔린다는 소문을 듣고는 클레몽-개누는 당시 팔레스타인 탐사 기구(Palestine Explore Fund)와 유명 고고학자들을 설득해서 그것을 사들였습니다. 그러고는 1891년 파리의 르부르 박물관으로 옮겨 복원하였습니다.

모압어로 쓰여진 메사 석비는 모압 왕 메사가 자기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모압의 뿌리를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던 사건과 함께 롯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합니다.(창 19:37) 이스라엘과 혈연 관계에 있는 친족인 겁니다. 하지만 모압은 하나님을 떠나 그모스를 섬기는 남이 되어버렸습니다.(민 21:29) 이스라엘보다 먼저 왕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왕정 체제를 만들었지만(민 21:10-20; 신 2:9-19) 그 왕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이었습니다. 민수기 22장 이하에서 발람을 통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 하려했던 발락이 바로 모압의 왕이었거든요.(민 22~24장) 이 모압에 발락 만큼이나 알려진 ‘메사’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당시 모압은 북왕국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치던 나라였습니다. 모압은 주로 목축으로 경제생활을 이어갔는데, 매년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바쳤습니다. 그런데 아합이 죽은 후 곧 이 조공을 멈추어요.(왕하 3:5) 더 이상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살아가지 않겠다는 선언이지요. 아합의 아들 여호람은 유다와 에돔 왕에게 도움을 구해 동맹을 맺고 모압 정벌을 시도합니다. 이 전쟁에서 벌어진 기적 같은 이야기는 열왕기하 3장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모압어로 쓰여진 메사 석비는 모압 왕 메사가 자기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모압의 뿌리를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던 사건과 함께 롯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합니다.(창 19:37) 이스라엘과 혈연 관계에 있는 친족인 겁니다. 하지만 모압은 하나님을 떠나 그모스를 섬기는 남이 되어버렸습니다.(민 21:29) 이스라엘보다 먼저 왕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왕정 체제를 만들었지만(민 21:10-20; 신 2:9-19) 그 왕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이었습니다. 민수기 22장 이하에서 발람을 통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 하려했던 발락이 바로 모압의 왕이었거든요.(민 22~24장) 이 모압에 발락 만큼이나 알려진 ‘메사’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당시 모압은 북왕국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치던 나라였습니다. 모압은 주로 목축으로 경제생활을 이어갔는데, 매년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바쳤습니다. 그런데 아합이 죽은 후 곧 이 조공을 멈추어요.(왕하 3:5) 더 이상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살아가지 않겠다는 선언이지요. 아합의 아들 여호람은 유다와 에돔 왕에게 도움을 구해 동맹을 맺고 모압 정벌을 시도합니다. 이 전쟁에서 벌어진 기적 같은 이야기는 열왕기하 3장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전쟁을 끝내고 기록한 것인지, 아니면 이 전쟁이 있기 전, 메사와 이스라엘 사이에 벌어진 전쟁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메사와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 기록을 보면, 성경이 말하듯, 오므리 왕조(오므리, 아합, 아하시야, 여호람, 아달랴)가 모압을 다스렸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5행) 메사 석비에 의하면, 오므리 왕조로부터 40년간 지배 당했다고 하는데, 성경의 연대를 근거로 계산해보면, 북왕국의 오므리, 아합, 아하시야, 여호람에 이르기까지 4명의 왕들이 모압에 지배권을 행사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적어도 성경에서 말하는 왕들의 기록은 대단히 역사적이었습니다.

성경은 아합이 죽은 뒤, 그 아들 때에 전쟁을 했노라고 서술하는데(왕하 3) 메사의 석비 역시 6행에서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또 그 전쟁 결과도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습니다. 기원전 9세기에 기록된 메사의 석비에 당대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는 사실에 놀랄 뿐입니다.

처음 이 석비가 발견되었을 때, 문학적으로 성경을 연구하던 연구자들 가운데에서 여호와 하나님 신앙이 매우 후대에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이나, 성경에서 말하는 왕들의 역사에 대한 진실성을 의심하던 학자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세기 후반의 일부 문헌학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다의 포로들이 만들어낸 창조적인 형태의 종교라고 주장했더랬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9세기에 기록된 메사의 석비 17행과 18행에 떡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겁니다.

메사가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면서 느보 (Nebo)를 점령했습니다. 느보에는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던 제단이 있었던 듯합니다. 고대 사회에는 전쟁 중에 신전에서 탈취한 물건을 자기들의 신전에 가져다 놓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대 사람들은 전쟁을 신들의 싸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쟁에서 진 신을 상징하거나, 그 신전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건을 이긴 신의 신전에 가져다 놓아 승리를 자축하는 것입니다. 마치 11~13행에서 아타롯을 점령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드리던 화로(제단으로 추정)를 그리욧에 있는 그모스 신전으로 가져간 것처럼 말이지요.

메사는 느보를 점령한 후, 여호와 하나님의 제단과 그 곳의 산당(또는 성소)에서 어떤 물건을 가져다가 메사가 예배하던 그모스 신전에 두어 그모스가 여호와 하나님을 이겼다고 선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자랑하면서, 석비에 새긴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름 ‘여호와’는 적어도 기원전 9세기부터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르는 이름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한 셈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 이곳 저곳에서 등장하는 도시 이름들과 고유 명사들이 석비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통해서 구약성경의 역사 기록의 진실성이 확증되는 계기가 되니, 이 또한 놀라울 따름입니다. 비록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모압 왕의 손에 만들어진 석비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성경이 믿음직스러운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