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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역사

이익상목사의 유물과 함께보는 성경과 역사

성경과 역사 9

검은 오벨리스크

쿠르크 석비

쿠르크 석비

아슈르 나시르팔 2세와 그의 아들 살만에셀 3세의 통치기간에 있었던 전쟁 역사를 기록한 석비이다.

1861년 영국의 고고학자 타일러가 터키 동부 비스밀 지역의 쿠르크 마을에서 발굴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고대 제국들이 있습니다. 이 고대 제국들은 이런 저런 모양으로 이스라엘/유다와 관계를 맺고 살았습니다. 어떤 이야기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어서 그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지만, 어떤 이야기들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들의 관심 밖에 있었기 때문에 성경 역사 이야기들(예를 들자면, 열왕기서나 역대기서)에 소개되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 중의 한 예가 카르카르(The Battle of Qarqar) 전투입니다.

앗시리아(우리말 성경. 앗수르)의 군대와 이스라엘의 군대가 대규모로 만난 첫번째 전쟁은 아합 시대였어요. 기원전 853년에 살만에셀(Shalmaneser III: 858-824 BCE)의 군대가 가나안과 아람 지역의 나라들이 결성한 연합군과 카르카르에서 전쟁을 벌입니다. 12나라의 연합군에는 이스라엘과 함께 [1] 하맛(Hamath), [2] 아람 다메섹(Aram-Damascus), [3] 암몬(Ammon), [4] 아르와드(Arwad), [5] 쿠(Que), [6] 이르카나타(Irqanata), [7] 쉬아누(Shianu), [8] 우산나타(Usannata), [9] 마수라(Masura), [10] 아랍(Arab), [11] 이집트(Egypt-이집트의 참전에 대해서는 논쟁적이다.)가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 연합군의 지휘관이 아람-다메섹의 하다드에셀(Hadadezer)인데요. 아람이라고 하면, 불과 몇년 전만 하더라도 아합과 전쟁에서 대패하여서 아합과 조약을 맺고 돌아갔던 나라입니다.(왕상 20장)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 되지 않아서 열두 개 나라가 함께하는 연합군의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어찌되었든 아합은 2,000대의 병거와 10,000명의 군인들을 참전시켰습니다. 이 전쟁을 기록한 쿠르크 석비(Kurkh stela)가 없었다면, 아마 역사에 이 전쟁이 있었는지 조차도 몰랐을 거예요. 또 성경에 등장하고 서로 다툰 아람의 벤하다드(우리말 성경. 벤하닷)와 아합이 서로 다투었다가, 성경대로 전쟁 후에 서로 조약을 맺고 친선관계를 맺은 후, 몇년 후에는 곧 연합군으로 함께 앗시리아와 견주어 싸웠다는 사실은 역사 속에 묻혀 버릴 뻔 했습니다.

map
  • 아슈르 단 2세 Ashur-Dan II (934-912 BCE) 시대의 앗시리아 영토 경계
  • 아슈르나시르팔 2세 Ashurnasirpal II (883-859 BCE) 시대의 앗시리아 영토 경계
  • 아슈르바니팔 Ashurbanipal (668-627 BCE) 시대의 앗시리아 영토경계
  • 고대사회의 주요 도시들
  • 앗시리아의 행정 중심 도시들
  • 앗시리아의 수도들
  • 옛 강이 흘렀던 길
  • 옛 해변의 경계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고고학의 발견으로 알려진 살만에셀 시대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또 있습니다. 아합의 뒤를 이어서 북왕국의 예후 역시 여전히 살만에셀에게 조공을 바치는 왕으로 앗시리아를 섬겼다는 것입니다. 예후는 아합 군대의 장군이었습니다. 길르앗 라못에서 요람, 그리고 유다의 왕 아하시야가 아람의 왕 하사엘과 서로 마주하고 있던 때, 요람이 전쟁 중 부상을 입었나 봅니다. 잠시 전열에서 빠져 나와 이스르엘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엘리사가 제자 중의 하나를 보내 예후에게 기름을 붓고 왕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 전장에 있던 군인들이 모두 예후를 따르게 되었어요. 예후가 요람과 아하시야를 죽인 후 북왕국의 왕으로 등극하고 이스라엘을 28년간 다스렸습니다.(842-815 BCE)

당시는 살만에셀이 아버지인 아슈르나시르팔(Ashurnasirpal II)이 그어놓은 국경을 넘어 동서남북 종횡무진 군사를 이끌고 영토를 넓히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니 살만에셀이 이스라엘의 군대와 만나는 것은 예측된 결과였지요. 이 영토 확장 전쟁에서 이미 이스라엘의 아합과 11개의 동맹 국가들이 연합하여 앗시리아의 팽창을 막아 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쿠르크 석비가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이미 강력한 위력을 과시한 앗시리아에게 반기를 든다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합의 뒤를 이어(비록 아합의 아들 요람을 죽이고 왕이 되기는 하였지만) 이스라엘의 왕이된 예후 역시 살만에셀의 정치, 군사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살만에셀은 비록 예후가 아합의 혈통은 아니었지만,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강력한 군주로 대표되는 오므리 왕가의 후예로 예후를 인정하였고, 그로부터 공물을 받아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예후의 사절단

예후의 사절단

검은 오벨리스크 첫 번째 변의 두 번째 둘에 새겨진 그림과 글.

역사적인 사실을 보여주는 고고학 유물이 살만에셀의 검은 오벨리스크(Black Obelisk of Shalmaneser III)입니다. 이 오벨리스크는 검은색 현무암으로 만들어 진 사각형의 기둥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825년에 당시 앗시리아의 수도인 님루드 (Nimrud)에 세워졌는데요. 님루드라고 하는 곳은 성경에서 갈라 (Calah)라고 하는 곳으로 함의 아들 니므롯이 건설한 도시입니다. (창 10:11) 사각 기둥의 꼭대기 부분은 마치 지구랏(Ziggurat)처럼 계단식으로 되어 있어요. 이 오벨리스크는 영국의 고고학자인 레이야드 (Austern Henry Layard)가 1846년에 발굴한 것입니다. 이 오벨리크스의 네 면에는 다섯 줄로 그림과 함께 조공을 바치러온 나라들을 나열하고 있는데요. 두 번째 줄이 예후가 보낸 공물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살만에셀 3세가 예후로부터 조공을 받는 모습을 새겨놓은 그림을 보면, 살만에셀의 뒤로 한 시종이 햇빛 가리개를 받쳐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후의 뒤에 있는 또 다른 시종은 마치 살만에셀에게 부채질을 하듯 하는 모습을 하고 있네요. 예후에게 조공을 받는 모습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살만에셀을 보고 있어요. 맨 양쪽의 사람들은 살만에셀을 호위하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 옆 면에는 두명의 앗시리아 관리가 앞에 서있습니다. 오벨리스크는 네 면으로 되어 있는데, 다른 면으로 넘어가면서 파노라마처럼 보는 방식이예요. 그렇게 파노라마로 보면, 호위병의 뒤로 세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만에셀에게 바칠 공물을 옮기고 있습니다. 다시 옆면으로 돌면 그 면에는 조공을 바치는 다섯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더 있는데요. 손에는 손잡이가 있는 항아리와 막대기, 잔과 왕의 홀과 막대기를 들거나 어깨에 메고 있습니다. 마지막 네번째 면에는 또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 다섯 명이 조공을 메고 이며 오는데요. 어깨에는 큰 그릇들과 손에는 손잡이가 있는 그릇, 그리고 머리에는 무언가를 이고 있습니다. 살만에셀은 오벨리스크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오므리의 아들 예후로부터 공물을 받았다. 은, 금, 금사발, 금대접, 금잔, 금주전자, 주석, 왕의 손에 들린 홀과 막대기”

독립 국가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합 시대 이후로 앗시리아의 속국으로 살아야 했던 북왕국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만에셀의 검은 오밸리스크 (Black Obelisk of Shalmaneser III)가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조공도 큰 소용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로부터 100여 년 뒤,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722BCE)

아벨 벧 마아가 Abel  Beth Maacha에서 2017년에 발굴한 두상

아벨 벧 마아가 Abel Beth Maacha에서 2017년에 발굴한 두상

아합 또는 예후로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