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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역사

이익상목사의 유물과 함께보는 성경과 역사

성경과 역사 16

웃시야 비문

웃시야 비문 (King Uzziah Burial Inscription)

웃시야 비문 (King Uzziah Burial Inscription)

권력을 가진 사람은 야망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야망이 그 사람을 갉아 먹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많은 왕들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유다의 왕 웃시야(809-756BCE)는 열 여섯 살에 왕이 되어서 예루살렘에서 오십이년 동안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그의 곁에는 늘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예언자 스가랴가 있었습니다.

(12 예언서 중의 하나인 ‘스가랴서’의 예언자 ‘스가랴’가 아님)

웃시야는 스가랴가 살아 있는 동안 항상 하나님의 뜻을 찾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웃시야가 하는 일마다 모두 잘 되게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그가 다스리는 동안 산지에는 가축들이 늘어났고, 평지에는 농부들이 마음 편히 농사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의 곳곳에 물 저장고들을 만들어서 목축과 농업이 번창했습니다.(대하 26:9~10)

전쟁에도 하나님이 승리하게 해 주셨습니다. 블레셋 땅의 가드, 야브네, 아스돗을 점령하였고, 블레셋 사람들이 살던 땅에 유다의 도시들을 세웠습니다. 아라비아 지역의 사람들, 유다 광야 남쪽에 웃시야와 대적하던 마온 지역의 사람들, 암몬 사람들을 전쟁으로 이겼습니다.

웃시야의 명성이 얼마나 높아졌던지 이집트 사람들까지 웃시야를 알 정도였습니다.(대하 26:3~8) 외적을 대비하기 위해서 벌판의 곳곳에 망대를 세우고, 큰 규모의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고대의 군대라는 것은 평상시에는 목축과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군인으로 소집되는 형태인데, 자기들이 경제적인 여유가 있으면 좋은 갑옷이나 무기를 소유할 수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목축을 할 때, 농사를 지을 때 입던 옷과 사용하던 농기구들이 전투복과 전쟁 무기가 되는 형태였습니다.

그런데 웃시야는 이천 육백 명의 지휘관들과 삼십만 칠천오백 명의 군인들에게 방패와 창과 투구와 갑옷과 활과 무릿매로 무장 시켜서 언제라도 전쟁에 투입될 수 있는 정예병으로 만들었습니다. 또 무기 제조 기술자들을 시켜 새로운 무기를 고안해서 만들게 했고, 온갖 신식 무기들로 성을 보호했습니다.(대하 26:10~15)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웃시야의 힘이 강해지면서, 웃시야가 하나님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력과 힘을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려고 하였습니다.

스가랴가 죽고 난 후에는 이런 웃시야를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막을 수 없는 권력을 향한 욕구는 정치 뿐 아니라, 종교의 영역까지 넘보기 시작했습니다. 제사장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소에 들어가 제사장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분향단에 분향을 하려고 했거든요.

하나님의 법을 아는 제사장 아사랴를 대표로 팔십 명의 제사장들이 웃시야를 말렸는데도, 기어코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막 분향을 하려고 할때, 악성 피부병이 온 몸에 생기게 되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소에 부정한 사람이 들어오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습니다. 권력과 힘, 그리고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왕이기에 성소에 들어오는 것을 말리기는 하였지만, 강제하지 못했던 제사장들이 웃시야의 이마에 악성 피부병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서는 황급히 성소에서 그를 쫓아냈습니다

웃시야는 죽지 않았기에 죽는 날까지 ‘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는 하였지만, 죽는 날까지 악성 종기(또는 나병)에 고통받았습니다.

부정한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성전을 드나들 수도 없었습니다. 악성 피부병 환자들은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어야 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왕궁이 아닌, 성밖에 있는 별궁에 격리되어 여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어디에 장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열왕기를 기록한 역사가와 역대기를 기록한 역사가의 기록이 서로 다릅니다. 열왕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웃시야를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성에 장사지냈다고 기록하였습니다만, (왕하 15:7) 역대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왕실의 묘지에 장사지내지 않고, 예루살렘 바깥 변두리 땅에 장사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럼, 누구의 기록이 맞다는 걸까요? 아쉽게도 아직까지는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만, 정결하지 않은 사람은 예루살렘 성 안에 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성밖, 성과 마주보는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 어디엔가 묻혔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1931년에 히브리대학교의 고고학자인 수케닉(Sukenik) 교수가 예루살렘을 마주보는 감람산의 러시아 정교회 수도원의 유물 전시실에서 가로와 세로가 각각 35cm 정도가 되는 납작한 대리석 판을 보았습니다. 1865~1894년 사이에 감람산에 러시아 정교가 땅을 구입하면서 수도원을 짓고, 그곳에 작은 박물관을 만든 후, 앤토닌(Archimandrite Antonin)이 그곳에 전시할 물품들을 사들이는 과정에서 사들인 대리석 판입니다.

이 판은 무덤의 입구에 붙어 있어서 무덤의 주인을 알려주면서 동시에, 무덤을 함부로 열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용도로 제작된 것이거나, 사람의 뼈를 보관하는 뼈 상자의 일부일 수도 있습니다.

그 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이곳으로 가져왔다/웃시야의 뼈/유다의 왕/열지 마시오.”

대리석 판에 쓰여진 글씨체의 특징으로 보아서 웃시야가 죽고 대략 700~750년 뒤(대략 30~70CE 사이)에 사람들이 웃시야의 묘를 보존하거나, 그의 뼈를 보존하기 위해서 이 글귀를 새겼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렇다면, 이 판이 발견된 장소만 알면 열왕기와 역대기 중, 누구의 기록이 더 정확한지를 알수 있을 텐데요. 너무나 아쉽게도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그 고고학 유물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유물 편람이 분실되는 바람에, 정확하게 어디에서 발굴되었는지, 누가 발굴했는지를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아쉽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대가 됩니다. 어느 곳에서 어떤 유물이 성경의 기록을 역사로 확증하고, 성경을 읽는 성도들의 궁금증들을 풀어줄 지.

그 때가 되면, 웃시야의 무덤도 찾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