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림의 강단
은혜와 진리로 이 땅에 오실 이
2024년 12월 8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기독교만의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계시의 종교입니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사람이 신께 나아가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둘째, 말씀의 종교입니다. 대부분의 종교가 나름대로의 경전을 가지고 있지만, 경전을 접하지 않고도 종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철저하게 말씀 중심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는 본문의 말씀처럼 말씀, 곧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는 기독교가 철저하게 말씀 중심의 종교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셋째, 예수님만이 구원의 주가 되심을 믿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 외에는 다른 어떠한 계시자를 기대하지 않으며, 그 어떤 계시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구원을 얻습니다. 구원은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게 될 때에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독교의 특징적 요소를 한 마디로 정의한 말씀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4절). 이 말씀은 복음의 핵심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신비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첫째 주일을 보내고 있는 지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몇 가지로 나누어 영적인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14~18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 감독회장 김 정 석
kwanglim-sp@hanmail.net
첫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새로운 생명운동의 시작입니다
본문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고 선포합니다. 본문을 기록한 요한 기자는 ‘인간’ 또는 ‘육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육신’이라는 단어, 즉 ‘Body’가 아니라 ‘Flesh’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로써 ‘육신’은 전인적인 것임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은 말씀이 전인적인 모습, 곧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가지시고 하나님의 차원에서 인간의 차원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와 같이 제한받기를 자청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슬품과 괴로움을 몸소 체험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나타난 바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살 때에 우리의 죽은 생명에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성경학자들마다 다른 견해지만, 병을 고치는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중요한 사역 중 하나였습니다. 사복음서에 예수님의 병 고치는 사역에 관한 기사가 대략 27번 기록되어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소망이 없는 사람들을 고쳐주셨다는 것입니다. 의원한테 가서 진료를 받아 보아도 아무런 가망이 없는 사람들, 즉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러나 예수님을 구원의 주, 곧 새로운 생명의 주인이심을 믿는 자들에게는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고, 어두움이 변하여 빛의 모습이 되며, 슬픔이 변하여 기쁨의 삶이 되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치유의 역사는 생명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육신을 입어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살 때에 능력의 역사, 즉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게 됩니다.
둘째,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은혜의 나타나심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나타나심, 곧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말씀합니다. ‘충만’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다 채워졌다는 공간적 의미, 내용적 의미, 시간적 의미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만나며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써 모든 것이 다 채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은혜 위에 은혜”라 하십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카린 안티 카리토스”라 표현하지만, 영어의 표현을 보면 “Instead of”로 ‘무엇을 대신하다’입니다. 이를 그대로 옮겨보면 ‘은혜를 대신하는 것도 은혜’, 곧 절대적 은혜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은혜 아닌 것이 없는 은혜, 은혜 아닌 것을 물리치는 은혜, 은혜의 최종 승리를 말합니다. 모든 것을 은혜가 되게 하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 절대적 은혜, 즉 은혜 위에 은혜를 소유한 사람은 부러울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을 아름답게 봅니다. 은혜 위에 은혜 안에 거하는 심령, 여기에 소망이 넘치며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긍휼함과 자비의 마음이 생기게 합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은 우리에게 은혜 위에 은혜, 곧 새로운 생명을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원하는 심령과 이를 통해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넘치게 부어 주시는 은혜를 더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셋째, 흑암에서 참 빛을 주시기 위해서 오십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 흑암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참 소망의 빛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곧 진리이다”(요 14:6)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를 진리로 자유하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참된 자유함을 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치적 자유를, 다른 사람은 경제적 자유함이 있으면 자유하다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보다 우리의 깊은 내면에 감추어진 죄로부터의 자유함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내면의 깊은 곳에 감추어진 죄의 모습 때문에 우리의 심령이 어둡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진정한 자유인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진리로 오시는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 우리 예수님을 우리의 삶에 주인으로 모실 때에 우리의 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내 의지와 노력으로는 매일 넘어지고 쓰러지지만, 진리로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을 모실 때에 우리는 죄의 용서함을 받을 뿐 아니라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여기에 참된 자유함이 있습니다.
진리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죄의 노예에서 흑암 가운데 살던 우리들을 구해 주시어 소망의 빛으로 인도하실 뿐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십니다.
매년마다 오는 성탄의 절기에 다시금 예수님을 모시고 새로운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늘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그리고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과 더불어 죄에서 자유함과 죄의 어두움을 이겨 소망의 빛으로 나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