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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림의강단

실수와 허물을 덮으시는 하나님

2020년 9월 20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창세기 20장 17절)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숙해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연약하고 부족한 유한의 존재입니다.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누구에게나 미숙한 부분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신앙생활 가운데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소유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연약함과 죄를 향하는 경향으로 인해 때로는 넘어지고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본문 말씀의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나안 땅을 떠나 그랄로 내려가는 그의 마음속에 불안감이 찾아옵니다. 자신의 아내 사라가 아름다웠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내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해옵니다. 그리고 정말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보고 아내를 삼기 위해 데려가는 일이 발생합니다. 자신의 누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아브라함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의 연약함이 커다란 실수를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커다란 실수와 허물은 그의 신앙의 여정을 실패로 몰아넣게 되었습니까? 오히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아브라함의 믿음은 더 굳건해지고, 나아가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실수와 허물이 그저 실패로 끝나지 않고, 더 성숙한 믿음으로 이어지고,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 모두 실수하고, 허물도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쓰라린 상처로만 남습니까, 아니면 다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됩니까? 본문의 말씀을 통해 아브라함이 실수와 허물을 딛고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보며 은혜 나누고, 믿음의 성숙을 이루는 계기로 삼기를 바랍니다.

시온 챌린지 아이들 만나길 바라는 예수님 마음 담아

창세기 20장 8~18절
8. 아비멜렉이 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종들을 불러 그 모든 일을 말하여 들려 주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10.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11.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12.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13.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14.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15.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16.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되었느니라 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18.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

  • 광림교회 담임목사 김 정 석
    kwanglim-sp@hanmail.net
첫째, 하나님은 약속한 것을 지키십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고향 갈대아 땅을 떠날 때, 하나님이 그에게 하신 약속이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이 약속의 성취를 위해서는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자녀가 태어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앞뒤를 함께 살펴보면 정황상 사라가 이삭을 잉태하여 낳게 될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약속의 성취가 임박한 때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 사라를 아비멜렉에게 보내는 중대한 실수를 합니다. 이 일은 이미 애굽에서도 저질렀던 실수(창 12장)의 반복이었습니다. 당시 하나님은 직접 개입하셔서 보호해주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대상과 시간, 환경만 달라졌을 뿐, 아브라함은 과거의 실수를 똑같이 저질렀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을 이루어갈 수 있을지 의구심마저 들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또 다시 개입하시어 은혜를 베푸십니다. 다시 한 번 아브라함의 실수와 허물을 덮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실수와 허물보다도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훨씬 큽니다. 그러므로 사건에 직접 개입하시고, 아브라함을 변호하시면서까지 위기의 상황을 뒤바꾸십니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 쉽게 변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반복되는 실수와 잘못까지도 받아들이시고 나아가 반전시키실 만큼 그 약속에 충실하십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인해 우리는 실패와 허물의 자리에서 낙심하여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복된 자리, 성장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둘째, 깨닫고 돌이켰습니다.

꿈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 아비멜렉이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9절)라며 아브라함에게 물었을 때, 그는 솔직하고도 정직하게 대답합니다.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11절)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의 말씀을 받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왔지만,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보다 자신의 생명 지키는 일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명을 먼저 보존하겠다는 비겁함과 두려움이 아내를 내어주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은 반복된 실수를 저질렀지만, 자신의 실수와 연약함을 솔직하게 고백하였습니다.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돌이키는 ‘회개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연약하고 때로는 죄를 지으며,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그 죄악을 덮거나 구차하게 변명하고 피해가려는 것이 아니라 죄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솔직하게 고백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요한일서는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라고 말씀합니다. 나는 실수와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고백, 그리하여 다시 나의 삶을 올바른 자리로 돌이키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용서가 임하며, 다시 새롭게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다시 붙잡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실수와 허물이 실패로 이어지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다시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7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그의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아비멜렉을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실 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12:3).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보니 아비멜렉은 자신을 통해 복이 아닌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그 저주는 아브라함의 실수와 허물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속히 언약의 말씀을 다시 붙잡고,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의 가정에 긍휼을 베푸시고 복을 내려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러자 그 가정에 치유와 복이 임합니다.

이 언약의 말씀은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인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의 통로로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사실을 붙잡는다면, 적어도 우리의 사명은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행여 저주마저도 축복으로 바꿔주시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세상의 복’이 되라고 보내십니다. 실수와 허물로 넘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다시 붙들고 거룩한 삶을 통해 세상의 복, 빛과 소금이 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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