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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림의 강단

잃지 말아야 할 정체성

2022년 10월 9일

“ ...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 마태복음 26장 56절)

심리학자인 롤로 메이(Rollo May)는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에서 현대인의 가장 크고 무서운 병은 ‘불안과 공허’라고 말합니다. 현대인이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무엇을 얻어야 하는가?’에 대한 가치관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가치관이 흔들리는 이유는 정체성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정체성을 상실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가룟지방 출신의 유다입니다. 열두 사도 중 한 명이었지만 요한복음 12장 6절에서는 그를 도둑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매사에 감정이 불안하고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그리고 목을 매어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가룟 유다의 비참한 인생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끝까지 친구로 인정해주시고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에서 가룟 유다와 같이 비참한 인생을 살았다 할지라도, 또한 미래가 비극적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친구로 불러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함께 나누며 우리를 불러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정체성이 확실해지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온 챌린지 아이들 만나길 바라는 예수님 마음 담아

마태복음 26장 47~56절
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55.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 광림교회 담임목사 김 정 석
    kwanglim-sp@hanmail.net
첫째, 나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본문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장면입니다. 그는 어떤 것이 자신에게 더 큰 이익을 가져올지, 어떤 것이 더 강한지, 모든 것에 저울질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의 특징은 정체성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나 신념이 아니라 힘과 이익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고 쉽게 주인을 바꿀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따른 이유는 구원이나 영생 그리고 천국이 아니라, 현실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나 특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자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버렸습니다. 그의 저울에는 예수님과 권력, 재물 등 올라가 있는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가 마지막에 선택한 것은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지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주인이 아니라 좋은 선생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가룟 유다와 같을 때가 있습니다. 선택의 저울 위에 예수님과 다른 것들을 많이 올려놓습니다. 때로는 예수님을 빼고 다른 것들로만 가득 올려놓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나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다른 것들입니까? 나의 주인이 곧 나의 정체성입니다.

둘째, 누구와 함께 있습니까?

가룟 유다의 이름은 ‘하나님 찬양’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던 열두 제자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더러운 귀신을 쫓고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마 10:1)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그가 있는 자리는 예수님의 반대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칼과 망치를 가지고 있던 무리에 속해 있었습니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자신의 정체성을 말해줍니다. 가룟 유다는 더 이상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배반자가 되어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했습니다.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와 우리 자신의 의지가 하나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택함 받은 성도로서의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데 우리의 삶이 그렇지 못하다고 한다면, 지금 누구와 함께 있는지, 무엇을 보고 쫓아가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반대편에 서 있는 가룟 유다에게 “친구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야 네가 있을 곳은 그 쪽이 아니라 이쪽이다. 너와 함께 있을 사람들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들이다”라는 뜻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반하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그를 친구로 인정하시며 끝까지 그가 돌아오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떠나 세상의 것들과 같이 있을 때도 “친구여”라고 부르시며 돌아오시기를 바라십니다. 내 인생이 잘못되고 있다거나 정체성이 혼란스러울 때, 누구와 함께 하고 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 있다면, 우리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시기 원하시는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순간에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 삶이 복된 삶이라는 것을 믿고 늘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회복시키시는 부르심의 은혜

오늘 본문 마지막 말씀은 가룟 유다의 배신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의 배신으로 결말을 맺고 있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56절) 결정적인 순간에 모두 예수님을 떠난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친구이기를 포기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더 이상 그들에게 예수님의 제자이거나 친구라는 정체성은 없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합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죄를 감당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에게 힘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끝내 예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의 배반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예수님은 홀로 고난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한 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떠나갔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다시 그들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한 때는 배반자였을지라도, 예수님께 돌아온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다시 예수님께서 친구가 되어 주시고, 형제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가룟 유다와 같이 모든 책임은 스스로 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 죄의 문제에 대해서 모두 책임을 지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돌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훗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만나셨을 때, 예수님께로 돌아간 제자들은 진정한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목숨을 내놓고 복음을 위해 쓰임 받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과거의 연약함도, 부족함과 실패도 예수님께 돌아오면 선을 이루기 위한 귀한 재료가 됩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가 온전한 주님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친구로 삼고 있던 세상의 모든 것들을 정리하고 우리 주님께 돌아가 참된 친구, 형제가 되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과 기쁨을 누리는 삶이 되기를 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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