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현장
선한 사마리아인 <윌리엄 벤턴 스크랜턴> 2
2022년 11월 13일
한국감리교회를 빛낸 해외선교사 11
권순정 목사(목회선교지원실)
▲ 스크랜턴이 세운 상동교회
조선에 파송된 미국인 선교사로 아펜젤러에 대한 기록과 연구는 많지만 스크랜턴의 가족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윌리엄 벤턴 스크랜턴은 미감리회에서 최초로 조선 선교사로 인준받았으며 아펜젤러 선교사와 함께 일본을 거쳐 조선 땅에 들어왔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갑신정변으로 인해 서울에 오지 못하고 있었을 때, 스크랜턴은 홀로 먼저 서울에 와서 아펜젤러 가족이 머물 수 있는 주택과 기반 시설을 갖춰놓았습니다. 또한, 정동제일교회 부지를 마련해 놓고 그곳에서 진료 활동을 했습니다. 아펜젤러의 순직 이후에는 한국 선교 관리자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주재 감독이었던 해리스와 선교 정책 이견으로 선교사직과 목사직을 사임하였기에 오랫동안 감리교선교의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아마도 그의 올곧은 성격과 ‘선교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이 다른 선교사들과 갈등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끝까지 소외된 사람을 향해 있었습니다.
한 손에는 복음을, 다른 한 손에는 약을
1885년 9월 10일, 스크랜턴은 정동에서 집 한 채를 구입해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그의 관심은 오로지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정동보다는 서대문 밖 애오개, 남대문시장의 상동, 동대문 성벽 안쪽 언덕 등, 당시로서는 서울 변두리 지역이자 빈민층이 많았던 곳에 시약소를 개설하고 장차 감리교 의료 선교 기지로 발전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동 땅을 팔고 남대문으로 선교 기지를 옮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선교사들은 안전한 ‘외국인 거주지’였던 정동을 포기하고 빈민 지역인 남대문으로 가려는 스크랜턴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1880년대 남대문 거리
하지만 스크랜턴은 왕궁과 외국 공사관, 양반 저택들로 둘러싸인 안전한 정동을 포기하고 1893년 봄부터 남대문 시약소 안에 있던 한옥 건물을 병원시설로 수리하고 정동에 있던 시설과 장비를 옮겨 1895년부터 상동에서 본격적으로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정동의 ‘시병원’은 상동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정동의 시병원 자리에는 정동제일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스크랜턴 선교사는 아펜젤러 선교사와 함께 선교여행을 다니기도 했는데, 아펜젤러는 성경책을 나눠줬고 스크랜턴은 약을 나눠줬습니다. 복음 선포와 의료선교가 함께 이뤄졌던 것입니다. 스크랜턴을 통해 치료를 받고 건강을 되찾은 사람들은 병원을 떠나지 않고 계속 주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스크랜턴은 이들을 위해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했습니다. 스크랜턴의 의료선교는 복음 전도와 교회 개척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