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현장
한국인보다 한국인을 더 사랑한 호머 헐버트 선교사 - 2
2024년 4월 14일
한국감리교회를 빛낸 해외선교사 (20)
권순정 목사(목회선교지원실)
헐버트 선교사가 1886년 여름 서울에 도착했을 때, 그의 신분은 조선 최초의 국립 근대식 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였습니다.
그는 처음 1년여 동안 장로교 선교사였던 언더우드와 한 집에서 살았으며, 아펜젤러를 비롯한 많은 선교사들과 교파를 초월하여 교류하며 선교사들 간의 소통을 도왔습니다. 또한 감리교회와 장로교회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선교사들에게 진실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891년 조선 육영공원 운영이 어려워지자 헐버트는 미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아펜젤러는 미국 감리교회 본부에 헐버트를 조선 선교사로 추천하였고 1893년 10월 감리교 선교사의 자격으로 다시 조선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의 선교 영역은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감리교 출판기관인 ‘삼문출판사’를 책임 맡는 동시에 볼드윈 예배소(현 동대문교회)를 책임 맡았습니다. 이승만, 주시경, 서재필 등이 헐버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교육자이자 선교사로서 조선 근대교육의 기틀을 다졌으며, 한글 대중화를 위해 많은 연구를 했습니다. 또한 세계 각국의 지리와 사회문화에 대해 가르치고 교과서를 만들며 조선 사람들의 세계관을 넓혀주었습니다. 그는 복음 전도를 위해, 교육, 사회활동, 문화운동 등 여러 방면에서 활동했습니다. 이러한 선교 방법을 ‘통전적 선교’라고 합니다.
그의 선교의 영향으로 많은 민족의 지도자들이 탄생했으며, 그의 한국에 대한 사랑은 한국 독립운동의 열매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서부터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했으며, 1903년부터는 타임즈의 객원 특파원으로 1904년에는 AP 통신의 객원 특파원으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도 했습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을 돕고 자신 또한 특사가 되어 직접 헤이그로 가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일본이 알고 방해해 헤이그 특사들은 회의장에 입장조차 못하고 특사 파견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를 빌미로 헐버트는 대한 제국에서 추방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미국에서 서재필, 이승만 등의 미주 독립운동가들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그는 기독교적 정의와 인간애를 삶으로 실천한 사람이며, 무엇보다 한국 독립의 숨은 영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