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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호 목사 2023.10.06


강남지역 청장년들인 민방위대원들이 성전에 가득 모였습니다.
"여러분 힘드시죠?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업에서 얼마나 어려우셨습니까?"
부드러운 목사님의 소리에 웅성거리던  예배당이 조용해졌습니다. 
예수님 예 자 한마디 안하시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잔 자들로 하여금 
고개를 내밀어 목사님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민방위교육장 분위기가 예배보다 더 종교적이고 부흥회처럼 
극정체험들이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강연 마지막은 윈스턴 처칠의 옥스포드대학 졸업식 축사로 
장식하셨습니다. " You never  give up !  포기하지 마시오
절대....절대....절대...."

급속한 산업화와 치열한 생존경쟁의 전장터에서  좌절하고 상처받았던
남자들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습니다. 
강연이 끝났는데도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훔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나도 맨 뒤자리에서 청강을 하면서 받아 적은 노트에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전쟁의 페허 가운데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이들의 눈물이 흘러흘러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부대학교총장님과 교수님들이 경제성장의 원인을 묻는 질문에
광림교회를 견학시켜주면서 
이곳이 적극적신앙의 원천수가 있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자 안에서 
할 수있다는 신념을 심어주고 근로 희생 봉사정신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면서
한강의 기적을 이루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누가 물어오면 김선도목사님은  심령을 변화시킨 위대한 설교가이며
상처입은  사람들의 치유자이시고
교회를 부흥시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도록한 탁월한 목회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광림교회 부목사 이야기  The story of a curate> 발행될 책 중에서
                                                        
조회수 0 2023.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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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성모 목사(풍화교회) 목사 2022.12.16


故 金宣燾 監督님 逝去에 부쳐

고 김선도 감독님 생전에, 크고 작은 은혜를 입은 이들이 무수하겠으나, 필자 역시 인생전환기, 감독님 내외분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태산이건마는, 일생토록 옳게 보답하지도 못하였다는 자책감으로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였으니, 졸지에 황망스런 감독님의 소천소식을 접하게 되었으니, 끝없는 부끄러움과 회한이 몰려든다.

먼 발치서 바라고만 있을 수 없었으니, 보잘 것 없지만 하얀 국화 한 송이를 들고 운구행렬을 뒤따라 광림수도원 뒷동산에 올랐다. 자작나무 숲 사이로, 광림수도원 경내가 한 눈에 들어 온다. 초겨울에 접어든 하늘이 온통 흐렸더니, 제법 굵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금새 함박눈이라도 내리는가 싶더니만....

수도원 샬롬하우스에서 기거하다

35년전, 서울올림픽이 마무리되고, 대한민국이 세계에 웅비를 시작하던 때 광림수도원 건물이 준공되었다. 나에게는 교인들의 영성운동과 교회임원 전지훈련을 위해 샬롬하우스에 상주하면서 감독님과 서창원박사님의 조수로 일하도록 보직이 주어졌다.

감독님은 이곳에서 교인들과 목회자를 위한 영성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실 것이라 말씀하셨다. 마침 곁에서 서창원 박사님은 ”서구교회들이 쇠톼를 거듭하면서 수도원운동이 다시 시작된다“고 거드신다.

나에게는 대성전 앞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도록 꾸며진 4층 끝방이 숙소로 허락되었다. 방 두칸에 제법 잘 꾸며진 콘도이다. 아마도 내 평생에 가장 크고 멋진 집에서 수도원지기로 일하는구나 여겨졌다.

나는 미국에 학업차 들어가기 전까지 광림수도원에서 원목으로서 새벽기도와 낮집회와 철야기도를 인도했다. 주중에는 신앙상담과 장기 와병중인 이들을 찾아 가정에서 성찬예배를 인도하였다. 연초에 교회임원전지훈련과 교역자 및 사모님들을 초청, 목회세미나와 위로회를 가졌던 추억이 상기된다.

당시, 나는 강남경찰서 종교담당자라는 이의 주기적 방문을 받던 때였다. 최전방에서 육군군목으로서 재직중, 서울종로 중앙교회에서 군선교주일에 초청받고 설교한 내용이 문제되어, 육군교도소까지 다녀왔는지라, 동태파악이 필요했는가 의심할 뿐이다.
그보다도 장교훈련까지 받았으나, 군에서 나온 후, 동원예비군에 속하여 보직을 소총수로 부여받았는데, 훈련기간 내내, 고문관노릇을 면치 못하였으니, 다른 예비군들에게 면목이 없었다. 총기분해결합 등, 기본군사 지식을 송두리째 잊었으니,어찌하랴!김선도 목사님께서는 그런 나를 광림교회에서 일하도록 불러 주셨다. 당시 필자에게는 `불온사상을 가진 전과자`라는 낙인이 있었으니, 막상, 육군교도소에서도 고등군법회의를 기다리는 동안, 독감방에 격리된 경험도 있고 하여, 행여 누군가에게 부담이 될까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김선도목사님은 광림교회에서 교육목사와 선교목사 및 영성개발 목사의 직임을 맡기셨다. 내게서 오명을 벋겨 주시려는 배려로 여겨졌다.


눈덮인 성탄절 이튿날 헌병대 영창에 면회오시다

1985년 성탄절 이튿날 점심 무렵, 헌병의 안내로 작전관 사무실로 들어서니, 김선도목사님 내외분이 먼저 와 계셨다. 방금 사단장을 만나고 나오시는 길이라시며, 사단장께서도 잘 해결될거라 약속했으니 조금만 참고 기다리라 말씀하신다. 그리고 내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축복기도를 해 주셨다.

”옛적에 수많은 선지자들도 고난을 많이 겪었으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듯이, 송성모 군목님이 오늘 당하는 이 고난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옵소서!“

갑자기 가습이 울컥하며 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내 맘속에 알 수 없는 평안이 밀려든다. 이제껏 억눌렀던 분노와 억울함, 원망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배설물처럼 쏟아져 나가버린 듯 후련한 느낌이다.
”고맙습니다!“ 제가 뭐라구, 이 먼곳까지 오셨으니...이를 어떻게 보답하나요!”

박관순 사모님께서는 두 눈에서 눈물을 닦으시고는, 내게로 다가와 내 두 손을 꼭 잡아아 주시면서, 말씀하신다.
”군목님, 힘내세요! 우리가 기도할께요!“

사모님이 친히 성탄선물이라며 전해주신 구절판에는 알록달록 형형색색의 약식들로 예쁘게 장식되었다. 영창에 있는 다른 수감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눈덮인 강원도 산골 헌병대 영창에는 하얗게 성에가 돋았다. 벽에 외로이 매달린 온도계의 붉은 눈금은 `야채 저장 온도`를 가리키고 있다.
헌병근무자가 하루종일 끼고 도는 분탄 난로는 근무자만을 위한 물건인지, 헌병이 서 있는 근처는 제법 따뜻해 보인다 헌병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를 지경이니 말이다.
그런데, 최창살이 막고 있는 영창안에는 난로의 온기가 100% 통과하지 못하는지, 냉기가 여전하다. 그야말로 차가운 감방이다. 난 내의를 두벌 껴입었고, 담요를 두 장 덮었어도 잠을 깊이 이룰 수 없었다. 추워서 몸을 움크리고 자다 보니, 여기저기 근육통이 온다.
필자는 전두환정권이 막강권세를 누리던 1986년 구속기소 되어 사단 헌병대 영창에서 대기하다가, 보통군법회의에서 3년 실형을 언도받고 육군교도소로 이감되었다.

보통군법회의가 종결되자, 아내와 6개월 된 딸 아이는 군관사에서 거주지를 밖으로 옮기라는 통고를 받게 되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동기 유기성목사님이 김선도목사님 내외분께 보고드렸고, 박관순 사모님께서는 아내를 위해 즉시, 전세방을 마련토록 전세금을 지원해 주셨다. 육군교도소 두어평 감방안에서 나는 다만 뜨거운 눈물을 삼켜야 했다.

감독님께서는 생전에 광림수도원을 매우 좋아하셨다, 수시로 수도원을 찾으셨다. 그런데 문제는 십여명 수도원 근무자들이 긴장을 늦출 수 없었으니, 감독님은 매번 수도원에 오실 때마다 지하보일러실에서부터 옥상 물탱크까지, 모든 문들을 일일이 열게 하셨으며, 세심히 살피셨기 때문이다.

감독님께서는 때때로, 한밤중이거나, 이른 새벽시간에 교인들보다 먼저 예배실에 나오시고 강단에서 무릎꿇고 기도하시는 모습을 자주 보이셨다. 새벽기도회를 마친 후에도 수도원에서 장,단기 숙박하며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일일이 안수해 주시고는, 다시 강단에 엎드려 교인들이 전부 예배실에서 나가기까지 오래도록 기도하셨다.


마지막 접견
필자는, 연전, 귀국인사차 감독님을 집무실로 방문했던 일이 있다. 그때 감독님은 내 손을 꼭 잡으시더니, ”이국 땅에서 수고 많았다“며 위로해 주셨다. 손주 호대목사님과
동갑인 제 아들이 무얼하느냐 물으셨으며, 부모님의 안부도 물어주시고는, 여느 때처럼 작별의 축복기도를 해 주셨다.
난 미국에서 구입해 온 `중국차`라며 선사해 드렸더니, 작은 선물임에도, 감사하다 말씀하시고는, 거저 받으실 수 없다시며, 내게 답례로, 작은 쵸콜렛 상자를 건네주셨다. 사모님이 금하시니, 더 이상 쵸콜렛을 못 드신다면서...

감독님은 기억력도 여전하셨다.
“송 군목님, 강원도 전방 군영창에 면회갔을 때, 눈이 무릎까지 쌓였더랬어요! 자동차가 미끌어지기도 했지요! 강원도 무슨 고개라던가, 올라가던 길이 참 어렵던데...!” “그래도, 송군목이 `공산당`이나 `간첩`이 아님을 내가 보증해야 한다 여겼어요,
그래서, 안 가볼 수 없었지! 사실 우리 집사람이, 새벽부터 올라가자고 먼저 서둘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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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뻘 나이에다, 당신께서 거느리시던 부목사 출신임에도, 감독님께서는 여전히 공대하신다. 감독님께서 오래도록 건강하게 지내시기를 기도드렸는데 그날의 접견이 내게는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이야...

아! 드디어, 감독님께서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시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치셨으니, 이제 그분의 영혼은 하나님의 품으로 떠나가시고, 여기에 그 육신을 장사하여 흙으로 돌아가시게 되었다.
나는 부드러운 흙을 한 삽 떠서 관위에 부토하였다. 내 두 손이 떨리는데, 문득, 박관순 사모님을 올려다 보니, 조용히 서 계신 채,고개를 끄덕이신다. 참으로 여장부이시다!

존경하는 김선도 감독님, 부디 하늘나라에서 평안을 누리소서! 아멘.
조회수 0 202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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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정 권사 2022.12.01


감독님!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조회수 0 2022.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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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두 권사 2022.11.29


할렐루야!
광림교인으로서 그 어른의 영향을 받지않은 성도들은 없을 것입니다. 
크기의 차이와 종류가 다르긴 할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80년대 초반 개발활동을 하고 있을때 얘깁니다.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집중하여 연구에 골몰하다가 애쓰던 끝에 결과물이 나옵니다.
이때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결과물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를 합니다.
반면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 머리가 좋다면서 내가 이걸 해냈어. 
이 어려운것을 해냈어 라며 자기만족에 도취하고 맙니다.  
이 두 사람의 결과의 차이가 어떨까요?

앞의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 하면서 기도를 합니다.
성도 여러분 !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면 더 감사할 일이 생깁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무엇에고 감사 하십시오 .
감사, 감사할 때 마다 더욱 감사할 일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금과옥조 같은 위의 말씀은 80년대 초반 김선도 감독님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물론 극동방송을 통한 대중을 위한 메시지였지만 온전히 저에게 주신 말씀으로 믿고
광림교회로 달려 나와 변화된 삶을 살아 왔습니다.

존경하는 김선도 감독님,
소천하시기 까지 세상을 위하여 또는 광림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베풀어 주신 은혜에 눈물로 감사한 마음 드립니다.
평안하게 안식하시옵소서.
조회수 0 2022.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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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교구 임채운권사올릴 2022.11.28


 
조회수 0 2022.11.28